우리땅 산줄기(초록)
- 조선시대 산경과 고지도에 의한
- 이우형(李祐炯) 초고/1994.6. 동해
들머리
산경의 개요
여지도의 산경
산경과 풍수
고래의 산경원리
현대의 산맥
우리산과 산줄기
마무리
덧붙임
[들머리]
한 민족이 한정된 땅에서 수 십 세기를 살아왔다면 지리적인 환경, 즉 그 땅의 지형 지세는 그들 사람의 생활 습관과 의식구조내지는 그 이상의 모든 분야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현재 우리 땅에는 지질구조(地質構造)에 의한 광주(廣州), 차령(車嶺), 노령(蘆嶺), 소백(小白), 태백(太白) 등의 산맥이 있다.
반하여 조선시대의 문헌 『산경표』(山經表)와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들, 그리고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 있는 지형표현에 의하면 이 땅의 산줄기는 물줄기(水系)의 수분기(水分岐)를 중심으로 가름한 산경 즉, 대간(大幹), 정간(正幹), 정맥(正脈)으로 구분한 15개의 산맥들과 여기에서 다시 가지쳐지는 기맥(岐脈)들로 규정한 산경개념이 있다.
현대의 지질구조 산맥개념은 땅 위의 산줄기가 아닌 땅 속의 맥줄기를 기준한 것으로서 1900년 초, 일본 지리학에서 전입된 것이고, 물줄기 개념의 산경은 땅 위의 지형 지세와 더불어 살아온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레 정립된 전통지리학의 기본이 된 것이다.
지리학은 인간을 배제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山地)로 이루어져 어디서나 그들 산과 이어진 산줄기의 영향을 받으며 오랜 세월 살아온 옛 선인들의 축척된 산악관, 그로 인해 정립된 15개의 산경과 그 줄기들이 우리에게 준 생(生)과 활(活) 문화의 영향 등에서 이 땅의 고유한 지리인식(地理認識)을 소고코져 한다.
[산경의 개요]
1. 문헌상의 『산경표』(山經表)
전래된 『산경표』는 대체로 1권 100여면으로 활자본과 필사본이 있다.
활자본은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1913년 영인본으로 간행한 본이다.(도리표(道里表)도 같이 간행하였다.) 필사본으로는 『여지편람』(輿地便覽) : 2권(乾-山經表, 坤-道里表)으로 된 것. (정문본 : 精文本)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 한 권으로 되어 있으나 속제목은 도로(九大路), 산경표, 도리표를 하나의 책으로 묶어 놓은 것. (규장각본 : 奎章閣本) 등과 그 외 수 개의 본이 개인에 소장되어 있다.
2. 『산경표』의 내용
전국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大幹),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하였으며, 그 산줄기 이름들이 기술된 것으로 유일본이다.
대간, 정간, 정맥과 여기에서 다시 가지쳐 뻗은 기맥(岐脈)의 연결은 자연지명(산, 고개이름 등)을 족보(族譜) 기술식으로 하였다.
산이름의 기록은 '삼각산일명부아산산재경북삼십리양주남삼십구리분이기(三角山一名負兒山山在京北三十里楊州南三十九里分二岐)'와 같이 이명(異名)과 읍치로부터의 방향, 거리 등과 중요한 기맥이 있을 경우, 그 분기의 수를 기록하였다. 여기에서의 거리는 직선거리가 아닌 도리(道里)이다.
참고로 『산경표』의 산이름과 여타 지리지 또는 고지도(古地圖) 상의 산이름은 그 표기에 있어 많은 차이점이 있다.
3. 산줄기(山經)의 이름
1650여개의 자연지명 가운데 대간, 정간, 정맥에 속하는 지명은 487개이다.
다음 ( )안의 수는 산, 봉이다.
① 백두대간(白頭大幹) 126(59) ② 장백정간(長白正幹) 16(6)
③ 낙남정맥(洛南正脈) 18(16) ④ 청북정맥(淸北正脈) 47(18)
⑤ 청남정맥(淸南正脈) 42(40) ⑥ 해서정맥(海西正脈) 31(26)
⑦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14(11)
⑧ 한북정맥(漢北正脈) 23(21) ⑨ 낙동정맥(洛東正脈) 31(26)
⑩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20(14) ⑪ 한남정맥(漢南正脈) 23(21)
⑫ 금북정맥(錦北正脈) 27(19) ⑬ 금북호남정맥(錦北湖南正脈) 9(7)
⑭ 금남정맥(錦南正脈) 15(11) ⑮ 호남정맥(湖南正脈) 45(32)
4. 이름의 뜻과 순서
1) 산줄기의 이름
가) 산의 이름으로 된 것 2 (백두, 장백)
나) 지방이름으로 된 것 2 (해서, 호남)
다) 강의 이름으로 된 것 11 (전체적으로 산맥이름이 강이름에서 비롯)
2) 산줄기의 순서
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을 중심 산줄기(筋骨)로 하고,
나) 이에서 가지친 한 줄기 장백정간은 "간"으로 특별히 구분하였으며,
다) 정맥은 백두대간의 끝 자락에서 가지친 낙남정맥을 우선하고, 다시 북으로 올라가 흐름에 따라 가지친 순서대로 정하였다.
* 순서의 의미와 산줄기 이름을 강이름으로 부여한 까닭.
1) 대간, 즉 백두대간으로 전국토의 중심 산맥으로 정하였으며, "간"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축으로서 우리 땅의 물흐름이 동쪽과 서쪽으로 크게 양분된다는 일차적인 지형적 의미를 가졌다.
2) 정맥으로는 북쪽으로부터 가지친 차례대로 이차적인 강의 유역능선으로 하였다. 이는 전 국토의 지세 지형과 강의 형성(形成), 유역의 발달과 그 세력을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특히 당시의 조운(漕運)과 관계한 지리인식을 담고 있으며, 광역의 생활문화권적인 의미를 지녔다.
3) 기맥(岐脈)은 강의 상류인 내(川)의 수분기로서 도시 중심으로 세분화되는 생활권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산줄기 이름을 강이름과 연관하여 부여한 것은 모든 산줄기가 분수령이라는 물 개념에서 산(山)이 곧, 그 강(江)을 이룬 물(水)의 산지, 즉 수원(水源)이라는 지극한 상식을 내포하였다.
5. 『산경표』의 저본(底本). 간행시기과 찬표자(撰表者)
1) 문헌상의 저본
조선시대의 관찬 지리지는 맹사성(孟思誠)의 『신찬팔도지리지』(1432), 『세종실록지리지』(1454), 『동국여지승람』(1481),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가 있고, 이후 영조 46년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가 당시까지의 문물제도와 지리 등을 총망라하여 간행하였다.
이들 지리지는 전대의 지리지를 기초로 하여 수정과 보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1770년의 『문헌비고』 역시 그 이전의 지리지들이 일차적으로 그 저본이었다. 이 『문헌비고』 가운데 「여지고」(輿地考)는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 : 1712 - 1781)이 찬한 것이다.
그의 문집 『여암전서』(旅庵全書)의 「산수고」(山水考)는 종래의 기술 방식의 체계를 혁신하여 과거의 치소중심(治所中心)에서 수계(水系)의 수분기 중심(水分岐 中心)으로 바꾸어 기록하였다. 이는 문헌상의 산경원리 정립이라는 뜻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상 『산경표』는 그 내용의 검토로서 여암의 「산수고」를 그대로 옮겨 족보 기술식으로 찬표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2) 찬표자(撰表者)와 간행시기
여암 신경준이 영조 45년 (1769)에 찬표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가) 여암은 1712 - 1781년이고, 『문헌비고』는 1770년이다.
나) 내용 가운데 한북정맥의 기맥에 '추모현 본명사현영종45년개명재경서부(追慕峴本名沙峴英宗45年改名在京西部)'가 있다. 영종 45년은 1769년이다.
다) 규장각본의 『해동도리보』는 도리표에 '수원(水原)을 화성(華城)'으로 표기하였다. 수원은 정조 13년(1789)에 화성으로 옮기고, 19년 (1795) 11월에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이상으로 간행시기는 현존 『산경표』로 미루어 볼 때 1800년이후로 보며, 찬표자 또한 미고임이 본고의 견해이다.
이 간행시기와 찬표자는 총체적인 산경원리에 있어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산경표』(1800년)는 조선시대의 문헌으로, 현재 남아 있는 대표적인 본은 세 가지가 있다.
규장각의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산경표』,
정신문화연구원의 <여지편람(輿地便覽)> 중의 『산경표』,
영인본으로 조선광문회가 1913년 간행한 『산경표』등이 있으나 모두가 같은 내용이다.
이 가운데 오자가 없고 출처가 분명한 것이 규장각 소장본이다.>
[여지도(與地圖)의 산경(山經)]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와 그 이전에도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존하지 않으므로 그 면모를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조선시대의 지도로는 공공도서관에 일반도(여지도(輿地圖), 팔도도(八道圖), 군현도(郡縣圖) 등) 만으로도 수 백 점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고지도 가운데 일반도로서의 전국도는 모두가 지형표현의 산맥들을 (그 이름들은 주기(註記)하지 않았으나) 수계중심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이와 같은 산줄기 표현의 대표적인 지도로는
* 가장 오래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 - 1402. 태종 2년. 이회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彊理圖)를 16세기에 모사한 것)의 우리나라 부분.
* 100만분의 1 정도의 우리나라전도로서 가장 오래된 1557년경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 국보 284. 국편 소장)는 산경원리의 대간, , 정간, 정맥 그리고 그로부터 가지친 기맥까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 지도제작의 기법상 저본의 지도를 기본으로 편집한다는 방법상의 이유로서 정척(鄭陟 : 1390 - 1475) 양성지(梁誠之 : 1415 - 1482)의 지도류도 현존하는 몇몇 필사본 지도에서 간접적으로 산경의 지형표현을 엿볼 수 있다.
* 이후 제작된 지도로서 정상기(鄭尙驥 : 1678 - 1752) 유형의 지도에서와 김정호(金正浩)의 <청구도>(靑邱圖)에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로 이어지는 모든 지도에서 이 산경원리에 의한 지형표현이 철저히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와 같은 산경원리 적용의 지형표현은 조선조에 제작된 여지도류(輿地圖類)와 도별, 군현별 지도 등에서도 독특한 우리나라 지도제작의 전통기법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특히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독도되는 산경은 선대(先代)의 전통기법(傳統技法)을 바탕에 두고 정확하게 산경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이는 현대지도의 등고선에서 독도되는 산계(山系)와 동일한 수계중심(水系中心)인 1 : 216,000의 거대한 지형지세도(地形地勢圖)로서 문헌상의 『산경표』보다 기맥(岐脈)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그 줄기들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 옛 지도에서 보이는 산경(山經) 표현의 기법은 나라 땅의 모두가 뫼(山)로 이루어져 그와 더불어 산(生과 活) 사람들의 공통된 상식을 그대로 지도 제작기법으로 정착되어지고, 발전되었다는 견해이다.
또한 지도는 그 땅과 더불어 한 사람들의 공통의식이 담아져야 지도로서의 가치기준(價値基準)이 인정되며, 독도(讀圖)의 이해력과 그 이용도가 점진된다는 제작 의도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이 땅의 산경원리는 문헌으로서 정리된 1800년의 「산수고」(山水考)와 『산경표』(山經表)보다 지도에서 지형표현의 전통기법으로 3~4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상식화된 공통된 지리인식으로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산경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정확하게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미루어 산경원리인식(山經原理認識)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누구나(識, 無識) 느끼고 인지하는 지리심성(地理心性)에 바탕을 둔 지극한 생활상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경과 풍수]
풍수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다시 일본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삼국의 풍수는 풍수라는 표기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지리사상으로 변모되어 있다.
'한반도의 지세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마친다. 그 세(勢)는 물(水)을 근본으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이다.'라는 도선(道詵 : 827 - 898)의 도선비기(道詵秘記)를 그 조(祖)로 하고 있다. 이 이론은 지형 지세는 국가와 개인의 길흉(吉凶)과 밀접한 관계를 했다는 것이다. 신라 말기로부터 초기 고려의 정치사회에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수 세기 동안 이 나라 지리학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공익의 이 설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극히 개인주의적 소유욕, 즉 길지(吉地)와 명당(明堂)에 집착한 특권계급 영욕의 도구로 타락하며 조선시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지리사상으로도 정착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그 이전부터 오악(五嶽), 십이종산(十二宗山), 외명산 사명산(外名山 四名山) 등으로 알려져 온 명산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팔도산맥(八道山脈)의 조종(祖宗)이 된다는 십이종산(十二宗山 = 삼각(三角), 백두(白頭), 원(圓), 낭림(狼林), 두류(豆流), 분수(分水), 금강(金剛), 오대(五臺), 태백(太白), 속리(俗離), 장안(長安), 지리(智異))의 산들이 간, 정맥(幹, 正脈)의 능선상에 있을 뿐, 자연지리에 바탕을 둔 산경원리(山經原理)와는 관계하지 않았다.
최근 발표된 풍수학의 한 논고(「풍수로 보는 우리 민족의 산」 - 최원석)에 의하면 천산 백산계 용산계 가산 등이 산경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풍수이론이 도선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 땅의 풍수로 정착하게 된 것은 이 땅의 산과 물줄기의 자연지리에 바탕한 것으로서 산경원리와 궁극적으로 한 맥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산경원리는 인간생활에 바탕을 둔 자연지리의 지형지세의 과학적인 정립이라는 점에서 전통지리학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자연히 풍수는 전통지리학의 한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래의 산경원리]
정리하면
1) 대간, 정간 - 이 땅의 근골(筋骨)로서 일차적으로 모든 수계를 크게 동서로 양분한다.
2) 정맥 - 대간에서 가지친 이차적인 산줄기로서 큰 강의 유역능(流域稜)이다. 따라서 정맥의 산줄기는 높이, 크기, 규모, 유명도 등과 관계하지 않고 아무리 낮고 미약한 김포평야의 낮은 구릉(25,000 지형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이라도 한강의 남쪽 유역능이므로 정맥의 줄기로서 한남정맥(漢南正脈)이 되고 있다. 정맥들로 구분되는 강은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同江),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 금강(錦江), 섬진강(蟾津江), 낙동강(洛東江)이다.
3) 기맥(岐脈) - 특별히 그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간'과 '정맥'에서 다시 가지친 산줄기로서 내(川)를 이룬 수분능(水分稜)이다.
이와 같은 물, 즉 강과 내(川)를 기본으로 한 산경원리는 현대 산맥개념과는 달리
① 모든 산줄기(山經 = 山脈)는 물줄기를 건너 뛰어 연결될 수 없다.
② 산줄기의 시작과 끝남의 지점이 명확하다.
③ 정맥의 시작은 특정한 산이고, 끝남은 대체로 해안까지이다.
④ 물줄기(水系)를 경계한 능선이므로 전 국토의 지형지세 이해를 용이하게 한다.
⑤ 물줄기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 형성의 자연스런 생활권역(生活圈域)과, 전체 유역면적(流域面積)과 그 지리적 세력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분하여 골(谷)까지의 수계파악(水系把握)도 용이하게 한다.
따라서 산경원리 그 자체는 인간생활을 기본으로 한 자연지리학(自然地理學)에 바탕을 둔 것이다.
[현대의 산맥]
산맥 : (국민학교 사회과 탐구 4-1 118쪽) ' 산들이 일정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산줄기'
산맥 : (국어사전 현문사) '여러 산악이 잇달아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지대'
산맥 : (지형학사전 1981 二宮書店) ' 산지(山地)가 선상(線狀)으로 길게 연속되어 있을 경우, 이것을 산맥이라 한다. 산맥은 하나의 산계(山系) 가운데 동일한 원인으로 형성되어 공통된 형성사(形成史)를 갖는다.'
국민학교 교과서와 두 사전은 산맥을 이상과 같이 기술했다.
현재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지리교과서의 산맥은 장백, 마천령, 함경,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언진, 멸악, 마식령, 태백, 추가령(구조곡), 광주, 차령, 소백, 노령산맥 등 15개이다.
이 같은 산맥과 그 이름들을 갖게 된 것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에 의해서 였다. 고토는 1900년과 1902년 2차에 걸쳐 우리나라의 지질조사 여행을 14개월에 걸쳐 하고 그 결과를 1903년 『동경대학기요』에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 = 조선의 산악론(朝鮮山岳論)」이라는 논문과 지질구조도(地質構造圖 1 : 2,000,000)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궁극적 목적이 합방 이후 감행할 수탈목적의 기초조사 연구였다는 의미를 강하게 하고 있다.
이후 야쓰 쇼에이(失洋昌永)는 동경에서 간행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서 지질구조 개념에 따라 한반도의 산맥을 규정했으며, 1905년 조선통감부 체제로 들어간 『고등소학 대한지지』라는 교과서가 야쓰 쇼에이의 한국지리를 그대로 옮겨와 전통적인 이 땅의 산맥 분류 체계가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1906년 8월에 일본은 서둘러 학제 개혁을 단행하고 각급학교령을 제정공포하며, 1910년 11월에는 한국인 저작의 각급학교용 교과서를 몰수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이들 산맥은
* 광주산맥이 금강산 북쪽에서 시작되어 북한강 상류를 서쪽으로 건너 북한산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 관악산, 광요산으로 이어지고,
* 차령산맥은 설악산과 오대산 근처에서 시작되어 남한강, 금강을 건너 대천(大川) 뒷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다른 산맥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이나 내를 건너 뛰고, 자연히 능선과 능선을 넘나들고 있으나 산맥이라는 개념을 땅 위의 지형을 도외시하고 땅 속의 구조선을 기준하였으므로 이들 산맥이라는 것이 산줄기를 가로로 , 물줄기를 세로로 건너 뛰고 넘나들며 휘젓고 이어진다고 하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일반 상식인 산맥과는 달리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 이것들의 삼차원적 배치의 층층을 기본선으로 한 것이다.
지리학과 지질학은 현대과학으로 그 구분이 명확하다. 땅 위에서 생활하는 인간을 배제한 지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100년 전의 전근대적인 산맥개념을 아직도 고집하고 교육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은 지질구조 개념의 산맥 이름을 이명으로 바꾼지 이미 오래이다.
[우리 산과 산줄기]
1. 산의 의미
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모든 나라에 있으나, 그 나라 사람들이 그 땅의 산을 생각하는 산관(山觀), 보는 시각은 각기 다르다고 본다.
생활의 대상, 신앙의 대상, 정복의 대상, 공포의 대상 이외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우리의 산은 옛부터
1) 낳고(시와 개) - *가락국의 수로왕이 구지봉(龜旨峰)에서 나오고,
* 신라 육촌의 촌주들이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왔다.
* 단군이 내려 온 신단수도 산이었다.
* 결국 우리 모두 산에 빌어 낳은 자식들의 후예인 격이다.
2) 살고(생과 정) - * 의식주의 모두를 산에 묶어 두고 살아 왔다.
* 세 칸 집을 지어도 산을 등지고 앉아야 편안함을 느낀다.
* 어린이가 처음 그림을 그릴 때 산부터 그렸듯
* 가락과 멋, 그림, 시, 문학
* 지식과 수양의 대상, 상상과 여유, 소망의 대상이다.
3) 쉰다(사와 륜) - * 들의 산소(山所)에 다녀오고도 '산에 갔다 왔다'고 한다.
* 영원한 쉼터를 산에 마련하고 환생을 기다린다.
우리의 산은 저만치 홀로 있는 산이 아니다. 사람과 같이 더불어 살고 살아 오고 있다. 눈을 뜨면 산이 보여야 안식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사람들이다.
결국 우리는 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귀결이다.
*) 천, 지, 인의 삼재가 우주의 근본이라는 속에서, 들(野)은 땅(地)이 아닌 산의 일부분이라는 우리 고래한 인식이다.
*) 산은 정상을 뜻하지 않는다. 남산의 철책 속만이 남산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현대가 낳은 짧은 소견이다. 청개천을 건너면 남산골로 접어들었던 산이 점차 그 소임을 박탈당한 것이다. 옛 산의 개념은 그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規模) 모두를 두고 어느 곳이던지 그 산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 정복의 대상일 수가 없다. 할 필요도 없는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 산천의 아름다움은 정신생활에 근원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중요시하였다.
*) 산과 그 산줄기는 모두가 물뿌리(水分岐)로서 생명의 시(始)인 물(重水)의 산지라는 인식이다.
2. 산경의 문화지리적 의미
하나의 대간과 하나의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 여기에서 가지친 기맥(岐脈)으로 이 땅을 가름한 산경원리의 인식은 세분회되어 발달되고 정착되어진 모든 생활문화의 권역적인 분계를 자연스레 이루고 있음을 이른다.
* 각 지방, 지역의 경계 - 우리나라를 크게 북부, 중부, 남부지방으로 나누고, 영남, 호남, 영동지방 등으로도 이야기한다. 다시 나누어 안동, 단양, 남원, 철원지방으로도 이야기하며, 해안에서는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지방으로도 구분하고 있다. 이들 지방의 경계를 편의상 행정경계를 기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산경도에서 볼 때, 북부는 해서정맥 이북, 중부와 남부는 백두대간의 태백산 속리산 구간과 한남금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그 경계가 대별되어 오히려 인문, 식생, 기후 등 자연지리적인 측면에서 예사스럽다.
해안지방에서도 대체로 내륙 어디까지를 경계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 도시(聚落)의 생성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의식으로 발달한 집단주거의 생성과 그 영향권역(影響圈域)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 의식주 - 의생활의 시작이 산에서 비롯되었듯이 주거양식(住居樣式)의 구분분포도 산경의 맥선과 동일하다. 한 예로 남해안의 한옥에는 대청마루에 반듯이 덧문이 있는데 내륙의 집에는 없다. 그 분포가 어떤 선으로 그어지느냐고 할 때 호남정맥의 남쪽과 낙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선과 동일한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 식생활. 우리 산은 먹거리의 보고이다. 북부, 중부, 남부의 음식문화가 다르다. 특히 젓갈류 사용권(황세기젓, 새우젓, 며루치젓)으로 가늠해볼 때 재미스러운 지역권을 형성한다. 특히 음식을 저장하는 독의 형태분포로 볼 때 강의 유역과 어우러진 문화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언어권 - 우리말의 방언을 도별로 대별하지만 같은 도내에서도 크게 다른 말씨가 있다. 경상도 말은 강원도 속초지방, 전라도 여수지방까지 분포되며, 같은 전라남도이지만 호남정맥을 기준하여 서쪽의 광주 말과 동쪽 산간 섬진강 유역의 곡성, 구례 말은 전혀 다르다. 특히 경기도의 수원말과 이웃한 용인 이천의 말이 다른데, 그 사이에는 한남정맥이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일일이 지적의 여지가 없다.
세분되는 언어권은 사람들의 습성과도 관계되며, 풍속, 놀이, 혼례, 장법 등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권으로 가락이 서로 다르며, 호남정맥이 결국 동편제, 서편제로 가름된다는 말은 현지인들의 증언이다.
* 농업, 상업 - 농업의 절기와 식생의 분포, 꽃들의 개화일(온도의 차)도 정맥들의 선에서 구분 관계하였고, 옛 보부상(褓負商)의 상권과 오일장(五日場)의 지리권역도 이들 산경의 산줄기의 영향에서 이루어졌다.
* 기상 - 현재 우리나라의 기상예보는 1989년 6월부터 행정단위구역 중심에서 지형 특성, 재해 특성, 생활권 등을 고려한 53개 국지예보구역으로 바꾸었다. 이 예보구역이 산경이 이르는 정맥과 그로부터 갈라져 국토를 세분화한 기맥들로 이룬 하나 하나의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 역사지리 - 삼국시대 이래 그 영토의 분할 변천이 이들 산경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문화역사지리 전반에 걸쳐 근원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산경원리의 인식으로 우리들의 기층적인 생활문화와의 관계를 보다 깊게 파악되고 향상의 바탕이 된다고 본다.
[마무리]
우리에게는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어 왔다. 여기에 단절의 한 시기로 누적되어 정수가 된 '진정한 우리만의 것'을 이어 받지 못한 아쉬움이 여러 부분에 있다.
우리 땅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창출한 모태(母胎)라는 점에서 옛 선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산경, 즉 우리 땅의 모든 산줄기는 물줄기 중심으로 가름한다는 산경원리를 소고하였다. 그 모든 크고 작은 산과 길고 �은 산줄기는 우리를 낳고, 살게 하고, 쉬게 하는 곳으로서 그 원초적 알맹이니 물(重水)의 산지라는 내재한 정의(正意)를 담고 있다.
물통은 없고 표주박 멋만을 자랑했듯, 물에 관한 한 참으로 축복 받았던 우리들이었다. 이들의 어린이는 멋과 가락, 상상과 여유의 산을 잊어 버리고 로봇트부터 그리는 시대에 우리는 있다.
이상 마무리하며 산경원리 인식의 작업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에서 우리 땅에 대한 보다 기층적인 연구와 토론으로 그 정립이 더욱 굳어지기를 바란다.
<덧붙임> 이 글은 『백두대간 관련 문헌집』(산림청. 1996. 327 ~337쪽) 에 실려 있습니다. 초록이기 때문에 글이 요약식으로 되어 있어 중간 중간에 연결상의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우형 선생님의 다른 글들과 함께 읽어보면 충분히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어떤 경우는 정리되어 있는 다른 글보다 좀더 이우형 선생님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원문이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직은 이 정도에 만족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은 처음에 나타나 있듯이 1994년에 작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예. 국민학교) 이 글을 옮기면서 명백한 오류가 아닌 한 본디 상태를 그대로 살리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어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들은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01/11/02 안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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